*
지금 나의 선택이 나머지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런 생각 이제 하지 않는다.
어딘가 조금 높은 곳에서 흘러낼려온 물줄기가 여울을 만나 잠깐 멈춰서 거기 담그고 있는 내 종아리를 휘감고 돌더니 다시 흘러간다.
흘러오는 대로 흘려 만나고 흘러가는 대로 흘려보내려 한다. 예상도 안하고 돌아보지도 않게 되기를.
교정을 마쳤으니 이제 일어나 창을 열어야겠다.
'사람이란 한순간 곁에 모이는가 하면 어느 순간 돌아보면 아무도 없기도 한다. 마치 약속된 주기를 지키지 않는 밀물과 썰물처럼.'
이것은 내가 썼던 소설의 한 구절이다. 초여름 초록의 무심과 무상을 넘어 지금은 나를 향해 어떤 물줄기가 흘러오고 있을까.
주기는 지키지 않았지만, 밀물이어도 좋겠다.
*
슬럼프나 정체현상 없는 고속질주도 끝없는 하얀 밤의 또다른 변형 아닐까?
밤이 오고 계절이 바뀌듯이, 그렇게 슬럼프도 오는게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닐까?
내가 무슨 로봇도 아닌데, 일정한 작업속도와 생산성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감기에 걸리면 며칠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어야 되는 것처럼, 슬럼프가 오면 파리를 잡듯 때려 잡는 대신 그냥 좀 쉬어줘야 되는 것 아닐까?
오죽하면, 정말 오죽하면 슬럼프가 날 찾아왔겠어, 하고 보듬어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냥 감기처럼 슬럼프를 편하게 받아들이면 안 될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는 사이클이 있으니까.
*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리 집착해도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른다.
- '새의 선물' 그리고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중에서.
최근 정말 뭐에 씌인것처럼 시간 날때마다 책을 읽어치우고, 영화를 보기를 반복하고 있다.
방전된 배터리처럼, 축 늘어져서 도무지 뭘 할 엄두가 나지않아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두가지 일을 계속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읽게된 은희경의 산문집 속 이야기들은 나한테 건네주는 위로같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찍어두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름대로 기운을 되찾아가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도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지, 위로가 필요할 때는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못난 마음에 괴로워할때는 다들 그렇다며 다독여준다. 참 신기한 책이다.
그래서 책의 끝이 다가오는게 괜히 아쉬워지기도 한다.
특히나 위에 옮겨놓은 구절들은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그대로 글로 표현했지? 싶을 정도로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던 부분들.
늦게 찾아온 사춘기같은 이 감정을,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구나, 생각했더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앞으로는 좀 더 메모를 습관화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오랜만에 블로그를 찾았다.
내 이야기를 담아줄 블로그가 나에겐 있었는데, 왜 그간 그렇게 괴로워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제는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블로그에 글을 써봐야겠다.
진짜 모습을 보이는 게 무서워, 다이어리에도 하지 못하고,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조금은 편하게 블로그에 담아내야겠다.
나에겐 표현의 연습도 필요하다.
'이야기 > 모든 요일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0) | 2016.06.07 |
---|---|
좋아하는 시와 몇가지 구절, 그리고 이야기 (0) | 2016.04.23 |
취하라 / 보들레르 (0) | 2016.04.23 |
백영옥의 소울푸드, 좋은 구절 몇 가지. (0) | 2014.02.01 |
나희덕 / 푸른 밤 (0) | 2013.12.20 |